열린지혜나눔 : 평범한 상상, 첫 번째 시간 <찬란한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입니다. 1주차 모임은 10월 18일(목) 오후 8시, 응암동에 있는 카페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한 때 15kg 감량경험자로서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고하)지만 지금은 그냥 유부남 & 애 아버지인 한국교회사 학도 강사님과 10명의 청년들이 모여 뜻 깊은 첫 모임을 가졌는데요. 강사님은 강의 후에는 자신의 논문이 많이 남았다며 손수 나눠주기도 하셨습니다. 참여하신 분들도 조금 어렵긴 했지만 이야기처럼 술술 풀어줘서 재밌었다고 했습니다. 

자 그럼, 첫 시간에 나눴던 한국교회 이야기를 올립니다. 


열띤 분위기의 모습. 분필이 보이지 않는다.




1.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일까요? E. 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J. 호이징가는 "역사란 하나의 문화가 자신들의 과거에 관해서 설명하는 하나의 정신형식이다."이라고 어려운 말을 썼죠.

한 마디로 말하자면 '
역사는 해석'입니다. 사건 그 자체로써의 역사, 가치가 진공상태인 역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역사는 생물'입니다.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입니다. 제가 굳이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서술이나 평가가 다르다고 해서 제 말이 맞고 그 사람 말은 틀리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2. 오늘,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텍스트(Text)는 주어진 것입니다. 역사에서도 텍스트가 있죠. 기록이나 증언들, 때에 따라서는 몇 년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규명된 일들이 그렇습니다.


컨텍스트(Context)는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보통 컨텍스트라고 하면 성경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이나 저자의 관점 등을들 수 있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쓰여지던 당시의 배경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이런 차이들에 따라 성경의 내용들도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컨텍스트는 바로 '내가 지금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예를 들어 이별을 경험했을 때 모든 이별노래가 다 내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성경도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어딜 펴도 다 나에게 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안해지면 그냥 무덤덤해집니다. 

역사적 사실들도 내게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때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한참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을 때라면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죠. 하지만 반대로 요즘처럼 한국교회가 개똥밭을 구르고 있는 것 같을 때에는 우리가 문제가 무엇이고, 잘못이 무엇인지 바라봐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찬란한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장로교의 분열

오늘은 장로교의 분열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장로교는 한반도에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순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선교지 분할정책'을 시행합니다.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경상북도는 미국 북장로교,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교, 경상남도는 호주 장로교가 맡아 집중적으로 선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쿠키뉴스


 

그런데 각 장로교마다 그 신학적 입장이 다 달랐습니다. 캐나다 장로교가 가장 진보적이었고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로 갈수록 보수적이었으며 호주 장로교가 가장 보수적이었습니다. 신학적 진보 보수라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가장 기초적인 수준, 진보란 성서를 과학적 방법까지 동원하여 해석한다는 것이고, 보수는 성서를 문자주의에 입각해 해석한다는 것으로 이해하셔도 충분합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별로 발달하지 않아 왕래가 잦지 않았기 때문에 각 장로교단의 신학적 차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그 지역을 맡고 있는 장로교의 선교에 따라, 자기들 방식으로 예수를 믿고 살면 되었던 것입니다. 

차종순 교수님의 해석을 따르면 해방 후 상당수의 북한교회가 공산당을 피해 남하하면서 남한교회가 급격히 팽창했고, 한국전쟁을 겪으면 동족 학살과 빈번한 이주 등의 이유로 계층과 공동체가 파괴되고 서로 뒤섞이게 됩니다. 이는 뜻하지 않은
문제로 연결되는데요. 서로의 '신앙'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이후 
1952년에 고신파 분열, 1953년에 기장파 분열, 그리고 1959년에 통합-합동 분열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요. 각 세력에서 짱 먹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죠. 즉 호주 장로교의 영향을 받은 
고신파의 한상동(1901-1976), 캐나다 장로교의 영향을 받은 기장의 김재준(1901-1987), 미국 북장로교의 영향을 받은 통합의 한경직(1902-2000), 미국 남장로교의 영향을 받은 합동의 박형룡(1897-1978)입니다. 특히 박형룡은 모든 분열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신 분으로 가히 '분열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분이죠.

사진 왼쪽부터 한상동(고신), 김재준(기장), 한경직(통합), 박형룡(합동)

 


3-1. 고신파 분열 : 신앙의 순수성 문제?

흔히들 고신파 분열의 원인을 신사참배 문제와 그 후 처리과정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사참배 
안 한 사람이 없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 겨우 50명 남짓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에 특이한 것은 경남노회 출신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까 선교지 분할정책을 이야기 할 때 경남은 가장 보수적인 호주 장로교가 맡았다고 했습니다. 가장 보수적이기에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신사참배 거부로 이어진 것이죠. 해방 후 그들이 출옥하면서 신사참배자들은 일정기간 회개하고, 신학교를 재건해야 한다 등의 내용을 담은 권징안(또는 재건안)을 발표합니다. (권징 
勸懲 : 교회의 윤리와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는 장로교회의 제도)

평양의 출옥성도들(1948)



이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성도들을 중심으로 해방 후 한국교회를 접수하겠다는 말이었고 당연히 신사참배를 감행했던 교회 내 기존 권력자들의 반발을 불러옵니다. 김관식, 홍택기 같은 이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강제에 굴복한 사람의 노고가 더 크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나섭니다. 
결국 이를 둘러싼 경남노회 내부의 갈등, 즉 누가 더 순수한 신앙을 갖고 있느냐는 문제 때문에 고신파가 분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근데 내부사정은 좀 더 복잡합니다. 경남노회는 신사참배를 안 한 한상동 파와 신사참배에 앞장 선 김길창 파로 나뉩니다. 
김길창 이 사람 아주 대단한 사람인데요. 친일파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친일파여서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도 잡혀가는 사람입니다.

제 49회 경남노회에서 어떤 목사님이 일본 고유종교인 신토의 최고 신, '천조대신'만을 섬기기로 다짐하는 '미소기 바라이'를 7번이나 했다고 공개 참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 누군가 "그게 뭐야? 난 들어본 적도 없는데"라고 해서 돌아보니 바로 '미소기 바라이'를 받도록 주도한 김길창이었던 것이죠.

천조대신. 일본 신화에 나오는 태앙신으로 일본 고유종교인 신토의 최고 신이다.



그러자 한상동이 화가 나서 김길창에 대한 제명을 요구하고 김길창이 급히 자리를 뜨게 됩니다. 당시 노회장은 당사자가 없으므로 처리할 수 없다며 넘어가게 되죠. 이렇게 경남노회가 한상동 파와 김길창 파로 나뉘게 된 것이지요.

김길창 파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그 문제는 양심적으로 이미 해결했다. 해방이 되었다고 죄로 운운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라는 것이죠. 이거 왠지... 홍대쪽에 로 생긴 교회의 이야기 듣는 것 같지 않으세요?
 
결국 한상동 파와 김길창 파가 모두 총회에 총대(총회대의원)을 파송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총대를 많이 보유한 파벌이 득세하기 마련이지요. 결국 경남지역에서는 비등한 세력이었지만 전국적으로는 소수였던 한상동 파가 밀리게 되죠. 한상동 파는 다시금 총회에 자신들의 파송한 총대를 인정해주길 요청했고, 총회는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으잉? 고려신학교는 또 뭐냐고요?

고려신학교는 경남 출신의 출옥성도들이 1948년에 만든 신학교입니다. 1939년에 일제가 사립교육법을 개정하면서 신학교들이 문을 닫게 됩니다. 대신 1940년에 일제에 입 맛에 맡는 조선신학교가 개교하게 되지요. 이 학교의 교장이 바로 김재준입니다. 조선신학교는 해방 후인 1946년,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로서 총회 인준을 받게 되지요.

그런데 경남 사람들이 중심이 된 출옥성도들 입장에서는 조선신학교 역시 신사참배 문제 등에서 현실 타협적으로 보였습니다.(라고 표면적으로는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1947년에 고려신학교를 만들게 되는겁니다. 여기 교장으로 온 이가 바로 박형룡이었는데 2년 만에 사임하게 됩니다. 박형룡은 미국에서 공부를 한 보수신학계의 거두였죠. 그는 고려신학교를 총회 인준을 받은 전국적인 신학교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상동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향력이 센 경남지역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신학교 운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고 박형룡이 나가게 된 것이지요.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을 교장으로 하여 1947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신학교가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신학교는 목회자 양성소입니다. 즉 신학교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한국교회를 안정적으로 접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권력다툼인 것이지요. 어쨌든 총회에서는 고려신학교가 인정하지 않고 조선신학교만이 유일한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정했습니다. 결국 한상동 파가 이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단을 탈퇴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고신파 분열은 마치 신앙의 순수성 문제로 나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현재 권력인 총대 파송을 놓고 벌어진 한상동과 김길창의 대립, 미래 권력인 신학교 운영을 놓고 벌어진 한상동과 박형룡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보자면 고신파 분열은 '선교지 분할정책'이 낳은 분열의 첫 열매라고도 할 수 있지요!


3-2. 기장파 분열 : 신학의 방향성 문제?

김재준은 캐나다 장로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함경북도 출신입니다. 캐나다 장로교가 진보적이었던 탓에 김재준 역시 진보적인 신학자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그러자 보수의 거두였던 박형룡 입장에서는 김재준의 조선신학교가 마음에 들리 없었겠죠. 결국 박형룡은 남산에 따로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사실 김재준과 한경직, 그리고 또 한 명의 진보신학자인 송창근(위 사진)은 항상 한 편이 되어 박형룡과 싸우던 사람들입니다. 이들 3인이 고등비평적 성경주석을 내자 박형룡이 이를 공격하고, 그러면 셋이서 힘을 합쳐 막고, 뭐 이러던 사이지요. 

그런데 김재준과 한경직은 종종 다투기도 하는 사이였답니다. 그래서 늘 송창근이 중재하는 역할을 했죠. 안타깝게도 송창근은 한국전쟁 초기에 납북되어 실종됩니다. 중재자가 사라진 것이죠. 만일 송창근이 오랫동안 김재준과 한경직의 곁에 있었다면 기장파 분열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김재준과 한경직이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지금의 영락교회 자리가 원래는 조선신학교 자리였다고 합니다. 남겨진 일제의 부동산을 나눌 때 김재준과 한경직이 미군정에 가서 조선신학교 자리로 받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나중에 한경직이 따로 가서 영락교회 자리로 바꿨다고 하는군요. 김재준과 한경직은 이 문제로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영락교회 측에서 돈 몇 10억을 줄테니 그만 싸우자고 제안했고, 조선신학교 측 인사들이 백억을 주고도 못 살 땅이라며 펄펄뛰며 반대했지만 김재준은 목사끼리 싸우는 것이 덕이 안 된다며 수유리로 옮겨가게 됩니다.

김재준과 한경직이 결별하자 박형룡이 김재준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목회자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조선신학교의 총회 인가를 취소하고 김재준을 제명합니다. 이에 경기노회와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는 각 지방의 세력, 스코틀랜드 선교부가 반발하자 대대적인 축출이 벌어집니다. 결국 김재준 파가 나가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설립하게 되는거죠. 이 과정에서 한경직은 미온적 태도를 취하며 분열이 진행되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사실 별로 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8회 총회(1953)에서 김재준을 파면하고 조선신학교 졸업생에게 교역자 자격을 주지 않기로 하다.



결과적으로 기장파의 분열은 진보냐 보수냐 하는 신학의 방향성 문제로 나뉘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면에는 부동산 문제로 인한 김재준과 한경직의 대립, 신학교 운영 문제롤 놓고 벌어진 김재준과 박형룡의 대립, 여기에 고신파의 경우 경남노회의 사례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형국으로, 이번에는 경기노회와 타 지역노회, 특히 이북 노회들의 총회내 주도권 대립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3. 통합 합동 분열 : WCC와의 관계 문제?
 

WCC의 로고. 오이쿠메네는 집, 가정, 세상이란 뜻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세상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통합과 합동의 분열입니다. 흔히들 세계교회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문제로 인해 분열하였다고 하지요. 

합동에서 WCC를 반대하며 문제 삼은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용공(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일)이고, 둘째는 자유주의 또는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입니다.

합동에서 WCC를 용공이라는 것은 러시아정교회를 비롯한 냉전시대의 동구권 교회들이 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WCC는 세계 최초로 이것은 '북침'이라고 규정하고 북한은 빨리 38선 이북으로 물러가라고 요구하지요. 유엔이 남한을 지지하고 참전했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중공이 북한 편을 들고참전하자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중국교회가 WCC를 탈퇴하기도 하지요. 
 
자유주의 또는 종교다원주의도 그렇습니다. WCC 안에 여러 사람들이 있는 게 맞긴 맞습니다. WCC의 영향아래 새로운 신학들이 발흥한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에서 태동한 진보적 신학인 민중신학도 WCC의 지원을 받아 생긴 것이지요.

여기서 잠깐 유럽의 신학적 사조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의 신학적 사조는 원래 정통주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대다수가 받들어 모시는 보수적 사조였죠.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합니다.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정통주의를 깨기 시작한 것이죠. 정통주의는 마땅한 반박을 하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 신정통주의입니다. 정통주의를 계승하되 맹목적이 아니라 말이 되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20세기의 대표적 신학자인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 모두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입니다.

정통주의  ->  자유주의  ->  신정통주의(칼 바르트, 폴 틸리히) 




그런데 한국에서는 바르트와 틸리히를 자유주의자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박형룡이 말하면 그것이 바로 법이었습니다. 박형룡이라는 보수신학계의 거두가 한참 활동할 때에는 그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그러한 오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1950-60년대에 박형룡이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한 것이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아무튼 WCC
가 자유주의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WCC는 자유주의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신정통주의도 들어와 있고, 자유주의를 전근대적 사고로 비판하는 포스트 모던주의도 들어와 있습니다. 단순히 WCC는 자유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통합은 분열의 이유로 '삼천만환 유용사건'을 꼽습니다. 당시 신학교가 잠시 대구에 있었는데 박형룡이 서울에 자리를 잡고 싶어 한 것이죠. 그래서 브로커 박호근을 만나서 정부에 이야기를 잘해달라며 건넨 로비 자금이 삼천만환입니다. 그런데 이게 딱 걸린 것입니다. 

박형룡 파는 처음에 우리 박형룡 박사는 재물에는 관심도 없는 분이며, 오로지 재무담당자가 나쁜 놈이라며 꼬리자르기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한경직 파가 절호의 찬스를 놓칠리 없죠. 결국 박형룡이 떠나게 되는데 보수주의자들이 박형룡의 일선 후퇴는 보수주의 신학의 몰락이라며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또 총대문제가 불거집니다. 기장파 분열 때와 마찬가지로 쟁투장은 경기노회인데요. 한경직 파가 1/3정도, 박형룡 파가 2/3정도 당선이 되었는데, 한경직 파가 재검표를 요구하니 대세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한경직 파가 기존보다 좀 더 당선되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연동교회에서 열린 통합총회(1960)와 승동교회에서 열린 합동총회(1960)



결국 한경직 파가 임시노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박형룡 파가 받아줄 리 없죠. 결국 한경직 파만 모여 열린 임시노회에서 재투표를 통해 한경직 파가 다수파로 당선이 됩니다. 당연히 박형룡 파가 이 결과를 인정할 리 없지요.  

결국 이 과정의 정점인 총회에서 양 측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 경찰이 출동했고, 시기적으로는 좀 차이가 있지만 지방에서는 박형룡 파 1명이 구타로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돌아가신 그 분은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순교자로서 이야기 되기도 하는데요. '순교'란 복음에 전하려다 복음에 적대하는 사람들의 고의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때에만 해당되는 말이지요. 결국은 상대파를 악마로 규정했다고 밖에 볼 수 없죠. 

표면적으로 박형룡 파는 WCC를 탈퇴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남장로회 선교부가 중재에 나섰지만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죠. 이에 한경직 파가 WCC에서는 탈퇴하겠지만 모든 연합사업을 중지할 수는 없다며 1959년 탈퇴하여 통합교단을 설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박형룡 파는 모든 연합사업을 멈추기 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연합사업이 성서와 찬송가 사업인데 이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수익사업입니다. 과연 정말 이 사업을 그만둘 의지가 있었을까요? 

결국 총대 파송과 신학교 운영을 둘러싼 한경직과 박형룡의 대립 속에서 자기 파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갈라설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통합측이 WCC를 탈퇴했음에도 분열이 치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WCC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통합이 WCC에 다시 가입한 것은 10년이 지난 1969년의 일입니다.


4. 분열되지 않는 감리교의 변선환, 홍정수 종교재판

장로교 이야기만 하면 섭섭하니 감리교 이야기를 해볼까요? 감리교는 분열이 잘 안 됩니다. 해방 후 복흥파다, 재건파다, 나뉘어 대립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합칩니다. 왜 그럴까요? 감리교는 포용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고, 좀 더 신학적 폭이 넓고 자유로워서 그럴까요? 에이, 그건 아닙니다.

여기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조직의 차이를 봐야 합니다. 장로교는 교회의 재산이 각 교회의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분열해서 나가도 자기들의 것입니다. 그러나 감리교는 감독제도를 채택하고 있고 재산은 중앙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분열해 나가면 교회를 반납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죠. 최근까지 감리교는 감독회장도 뽑지 못한 채 분열을 겪고 있지만 둘로 깨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곧 감리교가 갖고 있는 파주 쪽에 있는 어마어마한 부동산에 대한 그린벨트가 폴린다는 풍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누가 뛰쳐나가겠어요?

대신 감리교 안에서는 신학자에 대한 축출이 이뤄집니다. 변선환과 홍정수가 바로 그들인데요. 변선환은 종교다원주의자라는 이유로, 홍정수는 포스트모던 신학을 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을 받고 감리교에서 출교됩니다.

감리교에서 출교당한 변선환(왼쪽)과 홍정수(오른쪽)



당시 재판 동영상을 보면 진짜 코미디가 따로 없는데요. 일단 
재판이 열린 장소가 변선환과 홍정수를 고소한 김홍도가 시무하는 금란교회였습니다. 당시 감리교신학교 대학생들이 와서 데모를 하고 이를 막기 위해 김홍도의 동생인 용인대 체대 출신 김국도가 후배들을 데리고 와서 신학생들의 진입을 막고 패대기를 쳤다고 하죠. 변선환은 법정에 책을 산떠미만큼 갖고 와서 일일이 증거로 제출하는데 재판장이 지겨워서 죽으려고 하고요.


변선환이 자신의 출교 및 영구제명에 대해 변호하는 동영상


또 다른 '피고' 
홍정수는 재판장에서 "모두 다 날조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날조라고 할 만 한 정황이 많습니다. 홍정수가 하지도 않는 말을 공격의 빌미로 삼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어쨌든 핵심은 홍정수가 포스트모던 신학을 했다는 것인데, 이게 왜 문제냐고 하면 자유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신학은 자유주의와 가장 반대되는 방식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과학적 틀이라는 한 가지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정통주의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신학을 자유주의라고 공격하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 것이죠.

결국 저 유명한 감리교의 '삼도', 김선도(광림교회), 김홍도(금란교회), 김국도(할렐루야교회) 삼 형제는 부흥사 집단인데, 이들의 카리스마로 개교회가 총회를 능가하는 힘을 가질 정도로 성장했고, 권력유지를 위해 필연적으로 신학교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교수들, 즉 변선환과 홍정수를 축출하고 그 배경세력인 모 감독 공격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뭐 풍문에 따르면 장기천 감독이 타겟이었다고는 하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군요.


5. 다음 시간에는

오늘은 분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2주차에는 친일부역에 대해서, 3주차에는 독재와의 야합과 빨갱이 논쟁에 대해서 다룰 것입니다. 마지막 4주차에는 각 대안으로서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청년운동의 모습에 대해 살펴볼 생각입니다.


*** 강사님이 추천하는 좋은 책 ***
 

식민권력과 종교
김승태 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2.08.10, 페이지 523, 정가 22,000원


한국장로교회사
(형성과 분열 과정, 화해와 일치의 모색)
양낙흥 저 / 생명의말씀사
2008.04.05 / 
페이지 743 / 정가 34,000원
고신교단에서 폐기처분을 명령한 바로 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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