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교회청년’ 합시다!


요즘 교회는 ‘동네와는 상관없는 집단’으로 취급받거나, ‘교회답지 못하다’라고 욕먹고 있습니다. 이에 실망한 사람들은 교회를 등지고 있고요. 그리스도인과 교회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교회를 둘러싼 비난이 무지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최근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19.4%라고 합니다. 열 명 중에 여덟 명은 한국교회 못 믿겠다는 것이니 심각한 수준입니다.


저도 언제부턴가 일요일 저녁이면 쉬이 집에 돌아가기 어려웠습니다. 친구들과 동네 찻집에 모여, 그날 설교와 예배가 얼마나 허무했는지부터 시작해 한국 개신교가 이래서는 안 된다며 열을 내는 일이 많아졌죠. 그런데 결국은 피식 웃고 헤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동네교회청년>이니까요. 그런데 그 뒤로 계속 저 말을 생각나는 거예요. 동네와 교회와 청년이 ‘삼위일체’인 이 말에 우리들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세계’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내가 사는 동네를 섬기기로 작정한다면? 뭐라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내가 다니는 교회와 한국 개신교 전체가 상식적으로 교회답게 잘 굴러가고 있는지 관심을 갖는다면? 몇몇은 대단히 싫어할 것 같은데 전반적으로 참 좋을 것 같았죠. 공평하신 하나님은 교회 다닌다는 이유만으로는 청년세대가 겪는 고통에서 절대 빼주지 않는데 차라리 힘을 보탠다면? 가만히 있는 것보다 훨씬 낫겠다 싶었죠. 가슴이 두근거리더군요.


어느 추운 겨울, 친구의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자취방에 모여 <동네교회청년>이란 모임을 시작한 지 어느덧 2년여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놀기만 한 것은 아니였죠. 동네에서 ‘찬란한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 ‘복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선교와 동네선교’ 같은 강의를 개최했습니다. ‘동네를 위한 기도회’도 몇 번 열었고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청년들의 행동에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희들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돈 한 푼 안 생기더라도 <동네교회청년>으로 좀 더 살아보겠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몇 명 더 만나게 되었죠.


세상에서 조직을 만들려면 사람과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미 그런 것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좀 더 기회를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잘 좀 해보라고 말이죠. 이것들을 아무런 사심 없이 동네를 섬기는데 사용한다면 악화된 평판을 조금씩 바꿔갈 수 있겠죠. 물론 동네로부터 배울 것도 있을 겁니다. 이거야말로 복음의 실천이요 전파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진 청년들이 골골샅샅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선 이메일 주소(pjmdb@hanmail.net)를 적을 테니 연락하고 한 번 만나요.


여러분, <동네교회청년>합시다! ^^



희년함께 뉴스레터 2014.02.12


예수님의 선교와 동네 선교


‘동네에 교회가 있다고 해서 동네가 행복한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동네를 사심 없이 섬겨보겠노라고 시작한 <동네교회청년>이 1년을 훌쩍 넘었다. 그간의 활동을 되돌아보고 앞일을 모색할 필요를 느낀다.


때마침, 선교학을 공부하는 형, 손승진 씨가 학업을 위해 출국하는 것을 기념하여 지난여름에 열었던 ‘예수님의 선교와 동네 선교’라는 제목의 조촐한 강연이 생각났다. 이 글은 손승진 형의 강연을 듣고 생각한 바를 쓴 것임을 밝힌다. 그럼 이제 시작!


요즘을 흔히 ‘글로벌 시대’라고 한다. 새로운 일은 아니다. 예수님도 글로벌 시대를 사셨다. 로마 제국의 패권 아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사는 곳이었고, 성전이 자리 잡은 예루살렘은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예수님은 재개발 시대를 사셨다. 성서에서 악인 중의 악인으로 묘사되는 헤로데는 재건축 붐을 일으켜 도시와 요새를 건설하고 수도시설을 정비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죽고 못 사는 성전을 재건한 것도 그였다. 괜히 ‘대왕’이란 호칭이 붙은 게 아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요, 목수였던 요셉은 재건축 붐을 좇아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글로벌 시대, 재개발 시대를 살면서, 철저하게 ‘동네’를 중심으로 선교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간혹 큰 도시들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예수님의 선교는 변두리 지역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집중되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장 18~19절, 공동번역)


예수님이 선교에 나서면서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동네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예언자의 글귀를 낭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딱 한 마디를 덧붙임으로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분명하게 밝혔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관심은 가난한 사람,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에게 있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알려주고, 보게 하고,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겠다고 했다. 평생에 걸친 죽음의 위협은 이렇게 시작됐다. 가족들은 듬직했던 장남의 변심을 안타까워했다. 몇몇 동네에서는 내쫓김을 당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 못지않게 글로벌 시대, 재개발 시대를 살고 있다. 동네에서 외국인을 마주치는 것은 이제 별로 감격스럽지 않다. 커다란 쇼핑몰에 들려 장을 보고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은 매우 익숙한 행위가 되었다. 작은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던 산 중턱은 커다란 아파트 단지로 변한 지 꽤 됐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선교하겠다고 한다면 그 무대는 두말할 것 없이 ‘동네’가 되어야 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곳을 찾으면서 동네는 소홀하게 여기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동네에 살면서, 동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동네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우리의 선교를 통해 행복해져야 할 사람들은 분명하다. 동네의 가난한 사람,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발견해야 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알려주고, 다시 볼 수 있게 해주고,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일부 사람들, 예를 들어 권력자들이나 종교인들과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괜히 시비할 것은 없지만, 예수님처럼만 한다면 필연일지 모른다. 이 세상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이랴. 가족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고, 몇몇 동네 사람들은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우리는 사망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을 무릅쓰고 우리가 ‘동네선교’를 감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은 우리가 먼저 복음을 알게 되고, 해방되고, 다시 보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따라 살아보라고 권하시는 진짜 이유다.


"국가정보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국가정보원은 무슨 일을 하는 곳일까? 국가의 안보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그와 관련된 범죄를 수사하는 기관이란다. 더 풀어 말하자면 국가의 중요기관과 시설에 대한 보안을 책임지고, 마약이나 불법 무기의 반입이나 유통을 차단하며, 산업기밀이나 군사기밀의 유출을 막고, 국가의 안전과 관련된 일에 수사를 벌이는 곳이란다. 그래, 국가정보원은 그런 곳이다. 아니, 그런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곳이어야 했다.


국가정보원은 무슨 짓을 저질렀나! 국가의 공식 정보기관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 과정에 개입하여 특정후보를 비하하는 댓글을 달고 다녔다. 댓글 수가 몇 개라는 것은 이 사건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뜩이나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1961~1980)와 국가안전기획부(1980~1998)는 각종 정치공작과 조작사건을 일으켜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국가정보원도 똑같이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의 조사를 맡았던 경찰은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왜곡했다.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자 법무부 장관은 검찰수사에 외압을 가했다. 웬일로 검찰이 외압을 뚫나 했더니 기소내용이 기가 차다. 착, 착, 착,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야구의 643병살 플레이(1루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타자가 친 땅볼을 유격수가 잡아서 2루수에게, 2루수는 1루수에서 보내 병살을 얻는 것) 못지않다.


다행히도 국민들은 유신 시절 두려움에 떨며 침묵하던 사람들이 아니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학생들이다. 일부 세력이 이것을 극소수의 행동으로 몰아가려 했지만, 이번 시국선언을 시작하고 주도한 것은 이른바 비운동권 총학생회였다. 이들은 학내에서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이 일리 있다고 생각되는 현상이 교회 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얌전하고 사회문제에는 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청년들이, 진도 나가기도 빠듯한 성경공부 시간에 국가정보원의 불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꽤 많은 교회청년이 광장을 가득 메운 규탄시위를 방송과 언론이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한 유명 블로거의 글을 좋아하고,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하는 것을 보았다. 놀랍고 반갑기 그지없다.


<동네교회청년>에서도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정치개입에 대해 분노하고 대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논의결과 우리가 비록 작은 모임이지만, 이 사건의 엄중함에 대해 의견을 발표하고 행동하자는데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아울러 더 많은 청년단체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청년연합회(장청)와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K)에 연락해보니 이미 여러 청년단체가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어서 <동네교회청년>도 함께 하기로 했다. 기자회견에 올 때 각 참여단체에서 피켓을 만들어 와달라고 해서 밤늦게까지 문구를 선정하고, 종이를 오리고 붙여서 피켓을 만들었다. 다행히 디자인을 전공한 청년의 도움에 따라 ‘보색개념’까지 접목해 피켓을 완성했다.


2013년 6월 28일 오전 11시,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주의 파괴! 정치개입! 국정원 규탄 청년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청년연합회(장청)와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K) 등 기독교 청년단체는 물론 불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한국청년연합(KYC) 등 종교와 사회를 망라한 65개 단체가 함께 참여했다. 거기에 <동네교회청년>도 수줍게 이름을 올렸다.


전날 열심히 만든 우리의 피켓을 보더니 다른 단체 관계자께서 “엄청 신경 써서 만드셨네요.”라고 말씀하실 때는 뭔가 촌티를 낸 것 같아 쑥스러웠다. 하지만 뿌듯했다. <동네교회청년>이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올곧은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시간이 갈수록 엉뚱하게 전개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엔엘엘(NLL)을 포기했다는 둥, 국가기록원에 기록이 없다는 둥, 그래서 죄다 너희 책임이라는 둥, 국가정보원은 소중하니 비공개로 조사하자는 둥, 쟤가 나한테 막말해서 못 해먹겠다는 둥 하는 꼴이 참 든적스럽다.


쇼(show)하지 마라! 아무리 헷갈리게 만들려고 해도,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정보원이 불법적으로 정치에 개입한 것이다. 이 일을 사주하고 실행한 일당들을 일망타진해야 하며, 혹시라도 잘못된 일이 있다면 완전히 바로 잡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신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기 4장 10절) 오늘 우리도 민주주의를 살해하려 한 국가정보원과 그 배후에 있는 ‘당신’들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한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민주주의의 피가 땅에서 내게 울부짖고 있다!”


함께 분노하면 가능성을 연다


지난 성금요일을 보내며 나름 격정적인 글을 실었다. 고난주간에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초청된 강사가 며칠에 걸쳐 복 받는 것을 강조하고 헌금을 부추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을 직접 목격한 후 분노에 차서 밤잠을 설치며 쓴 글이었다.


다시 한 번 부활을 고백하고, 삶은 달걀을 많이 먹었지만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사이 그 교회는 새로운 헌금을 만들어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 강사는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까지 넘다 들며 복 받는 법을 설파하고 있었다. 무언가 해야만 했다. 동네시장에서 청년들과 떡볶이를 먹다가 포크를 내려놓으며(실은 다 먹었기 때문에) 결심했다. “그래, 진짜 복이 무엇인지 한번 가려보자!”


한국 개신교가 어쩌다가 이렇게 저급하게 복을 구걸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크로스로에 '한국교회 흑역사'를 연재하는 손승호 전 교회협 간사를 섭외하기로 했다. '동네교회청년'의 단골강사(?)이기도 한 그는, 늘 그렇듯 무심한 척하며 섭외에 응해주었다.


성서에서는 '복'을 무엇이라 말하는지 궁금했다. 여러 곳에 추천을 받았는데 하나같이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김근주 연구위원을 꼽았다. 와주시기만 한다면! 행사의 취지를 담아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고 얼마 후 아주 짧은 답장이 돌아왔다. “좋습니다. 격려를 보냅니다.” 알고 보니 동네이웃이었다.


이번 행사의 이름을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흉내 내어 <복福이란 무엇인가>로 정했다. 웹자보는 평소 눈여겨보았던 뱅크시의 작품을 빌려 만들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양손에 쇼핑백이 주렁주렁 달린 그림이었다. 저작권을 걱정했는데 다행히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을 마음껏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있었다. 홍보는 페이스북을 통해 공짜로 신 나게 했다. 행사에는 약 20여 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그들 중에는 사람들로부터 '집사님'이라 불리는 청년들도 있었다.


"한국 개신교와 기복신앙"이란 주제로 강의한 손승호 간사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사람들의 불안이 극심해졌고 그들을 대상으로 개신교 일부가 복을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람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위로는 얻었고 개신교 일부는 이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으며 결국 개신교 대부분이 그런 태도를 답습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복"이란 주제로 강의한 김근주 연구위원은 우리가 흔히 '복'의 대표주자로 떠올리는 아브라함이 사실 공평과 정의의 삶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했다. 시편 73편을 풀어 설명하며 악인의 형통이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 아삽의 깨달음을 전한 뒤 우리가 구해야 할 진짜 복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의 의지로는 절대 누릴 수 없으니 기도하라고, 특히 부모와 교사는 자녀와 학생이 그런 삶을 살도록 기도하라고 했다.


강의 후에는 강사와 참석자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여기에 왜 오게 되었고 오늘 모임이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일명 '속풀이 대화'를 나누었다. 귀 기울여 들으면서 이들을 여기로 불러 모은 힘은 각자가 나름대로 느낀 '분노'가 아닐까 생각했다. 문득 고난주간에 그 말도 안 되는 집회를 목격하며 분노로 치를 떨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혼자 꾸는 꿈은 그냥 꿈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바꿔 말하면 어떨까. 혼자서 분노하면 속만 상하지만 여럿이 함께 분노하면 가능성을 연다.


청소년의 권리를 허하라!


황당 사연 하나

고등부 아이들이 주말에 교회 고등부실에 와서 공부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주말에는 학교가 문을 닫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독서실에 가자니 돈이 제법 들고. 그래서 자기들 딴에는 교회가 생각났나 보다. 애들이 공부를 하겠다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가! 고등부실은 예배드릴 때를 빼고는 거의 비어있으니 안 될 것도 없겠다 싶어 교회에 물어보았다. 대답은? 곤란하단다. 아니 왜? 사고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사고는 무슨 사고란 말인가? 하나님이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데!


어처구니 없어 계속 따지니까 그러면 사용하게 해주겠는데 대신 나를 비롯한 어른이 한 명이라도 꼭 같이 있어야 한단다. 아, 비릿하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막말로 사고가 생기면 나보고 책임지라는 것 아닌가.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은 고등부실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책임질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할 때와 쉴 때를 구분했고 간식을 싸가지고 와서 함께 나눠먹기도 했다.


황당 사연 둘

청년부 소모임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청년이 개업한 찻집에 가기로 했다. 축하인사도 하고 거기서 성경공부도 할 요량이었다. 절차대로 차를 빌려 출발하려는데 우리를 본 몇몇 목사님들이 다가와 왜 차를 갖고 나가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차를 갖고 나가는 기준과 절차를 다시 정리해야겠단다. 그래서 매번 차를 빌릴 때마다 불편하고 불쾌하니 청년들이 차를 잘 사용하게끔 정리해달라고 말했다.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신다.


왜 이러나 알아보니 예전에 차를 급하게 써야 할 일이 생겼는데 마침 청년들이 차를 먼저 갖고 나간 적이 있었나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일 때문에 지금 당장 필요한 일에 차를 쓰지 말라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청년들이 외부 활동을 위해 교회 차량을 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청년과 소년들을 통칭하여 청소년이라 부른다. 그들도 엄연히 교회공동체의 일원이다. 예배에 출석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푼돈일지언정 헌금을 한다. 성도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도 교회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야 하고 교회의 물건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 규칙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권리로부터 배제당해서는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낮다는 이유로 업신여기는 것이라면 가만히 참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따위 일이 어느 한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 ‘웹면’을 빌어 글을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슷한 일들이 광범위하게, 그리고 당연한 듯이 벌어지고 있다. 청소년들은 그것이 합당한 것인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복종할 것을 강요당한다. 교회가 사람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고 되레 관리나 통제를 일삼으려 해서는 안 된다. 자고로 청소년들이 등을 돌리면 그 공동체는 망하는 법이다. 다음세대가 희망이니 뭐니 하는 말뿐인 잔치는 걷어치워야 한다.


바로 이 고난주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택을 궁금해했다. 그가 분연히 일어나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고쳐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대로 그가 이렇게 더러운 곳에 발을 담그지 말고 좋은 선생으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뭔가를 발표할 거란 소식이 들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 섞인 기대를 내뿜으며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드디어 굳게 다물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마태복음 5장 3~10절, 새번역


예수가 그의 지지자들에게 한 말이다. 그의 ‘출마’를 기대했던 사람들로서는 다소 맥 빠지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고심 끝에 완성한 '출마선언'이었다. 그의 말은 이런 것이다. “내가 생각해보니 ‘복(福)’ 받는 인생이란 이런 거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 거다. 그러니 여기 모인 당신들도 함께 이렇게 살자.” 사실 이 ‘출마선언 사건’은 ‘고난과 죽음 사건’과 더불어 예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극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두 사건은 응당 맞닿아 있다.


예수는 그 후부터 이 선언에 걸맞게 복을 구하는, 말하자면 ‘구복인생’을 살았다. 몇 해에 걸친 구복인생의 절정은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일주일이지 않나 싶다. 오늘날 예수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보낸 그 마지막 일주일을 특별히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 그 기간을 ‘고난주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기억하고 지킨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에 담긴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 놓치지 않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 고난주간을 지내며 한 교회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교회는 비교적 건실한 공동체였고 담임자는 양식이 있는 유력한 사람이었다. 그 교회에서 고난주간을 맞아 간증집회를 열게 되었다. 초청된 강사는 어려운 역경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나름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그분 개인의 신앙적 경험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이며 그가 불굴의 노력을 기울인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해 보였다.


그런데 그 자신의 경험이어야 할 것을 ‘복’으로 규정하고 집회에 온 사람들 모두에게 일반화시키려 하면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꽤 괜찮은 그 공동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하루하루 들려오는 소식을 도무지 믿을 수 없고 가만히 있자니 너무 속이 상해 결국 한번 가보았다. 직접 보고 들으니 이것은 거의 ‘참사’나 다름없었다.


우선 그는 ‘일천번제’라고 이름 붙여진, 1,000번의 예배를 드리라고 권했다. 자신은 이미 ‘오천번제’ 가까이 드리고 있으며 목표는 ‘일만번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예배 한 번 당 10,000원씩 헌금을 드리라고 했다. 자기 주변에는 30,000원씩 내는 사람도 있는데 일단 기준은 10,000원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개인당 1,000개의 헌금봉투를 묶음으로 준비하라고 했다. 1,000원은 내지 말라고 했다. 1,000원과 10,000원이 같겠냐고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것이 바로 ‘막말’이다.


'소망의 십일조’라는 신조어도 들었다. ‘소망’은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 소중한 가치이고 ‘십일조’ 역시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의무다. 맛있는 음식도 섞으면 입도 못 댈 잡탕이 되듯이, 두 단어가 결합되자 해괴망측한 뜻이 되어버렸다. 즉 1억 원을 벌고 싶으면 먼저 그 십 분의 일인 1,000만 원을 헌금하라는 말이었다. 빚을 내서라도 먼저 하라고 했다. 십일조는 꼭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에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물권(物權)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예수를 ‘이런 분이다’라고 말하기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런 분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비교적 쉽다. 일종의 ‘부정의 부정’인 것이다. 예수는, 내 장담하건대, 예배 1회당 헌금은 1만 원을 해야 한다느니, 십일조는 빚을 내서라도 먼저 내라느니, 그래야 사업도 성공하고 자식도 복 받는다느니, 이따위 쓰레기 태우는 소리를 하실 분이 절대 아니다. 사기를 치더라도 적당히 하고, 미치더라도 곱게 미쳐야 한다.


궤변이 끝날 때마다 그는 몇 번이고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다른 때도 아니고, ‘고난주간’이기에 더욱 그랬다. 고난주간에 예수는 어떤 일을 겪으셨나! 폭행을 동반한 납치와 강제구금, 불공정한 재판과정에서 받은 사형선고, 다시금 가해진 폭행, 강제탈의, 모욕과 조롱, 잔인한 사형 집행과 그에 따른 쇼크사! 물론 우리는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믿음을 다해 고백하며 그에 걸맞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 고난주간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보고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예수는 지금도! 여전히! 완전하게 발가벗겨진 채, 조롱당하고, 처 맞고 있었다!


바로 이 고난주간에!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중에서


"비례대표제 확대에 동참할 젊은이 어디 없을까?"


다 지난 이야기지만, 작년 한 해는 말 그대로 ‘정치의 해’였다. 연 초부터 시작해서 4월 총선을 지나 12월 대선까지 사람들은 각자의 정치적 희망을 마구 내뿜으며 살았다. 희망은 자유니까 뭐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매우 눈에 띄는 분들이 계셨다. ‘자유’와 ‘민주’라는 현대사회의 소중한 가치 앞에 숭고한 신앙의 언어인 ‘기독’까지 덧붙여 삼위일체를 이룬 바로 그 분들. 바로 기독자유민주당이었다. 자신들을 찍어주면 교회의 은행이자를 2%로 내려주겠다는데 은행에 빚진 죄인으로서 어찌 그 달콤한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기독자유민주당 말고 한국기독당도 있었다. 기독자유민주당과 한국기독당은 선거 막판에 범 기독진영의 대통합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여담이지만 불교연합당도 있었다.)


그런데 해프닝으로 그칠 것 같던 이 분들이 예상외의 선전을 했다. 기독자유민주당이 19대 총선에서 얻은 정당득표율은 1.2%로 당시 현역 국회의원이 소속된 원내정당이던 창조한국당(0.4%)보다 높고 진보신당(1.13%)은 물론 언론에 종종 주목을 받던 녹색당(0.48%), 청년당(0.34%)보다도 높은 득표율을 얻은 것이다. 거기다 한국기독당(0.25%)까지 합치면 범 기독진영의 정당득표율은 무려 1.45%에 육박한다. 물론 그 분들의 성에 찰리는 없었다. 기독자유민주당 핵심인사들은 선거 당일, 모 신문사가 입주한 빌딩 와인바에서 개표결과를 보며 자축하려다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라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는 후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 어르신들의 믿음이 부족했던 탓일까? 그럴 리 없다. 그 분들이 어떤 분들인데. 문제는 바로 제도 탓이다. 자, 이제부터 이 ‘황면서생’이 제갈공명에 필적할만한 비책을 내놓을 터이니 누가 좀 크로스로 들어와서 보라고 알려줬으면.


기독당과 같은 소수정당이 의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거대양당에게 유리한 선거제도를 고쳐야 한다. 이건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니까 더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곧바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밝히겠다. 바로 비례대표제가 확대되는 길 밖에는 없다. (목사님! 박사님! 이제 아시겠죠?) 우리나라도 현재 전체 300개 의석 중 54석을 비례대표로 뽑고 있는데 이는 전체 의석의 18% 정도로 맛 배기 수준이다. 비례대표제의 비율을 최소 50%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 이미 수많은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는데 아마 제일 유명한 것이 ‘독일식’ 비례대표제일 것이다. 독일 제품이 튼튼하고 좋은 것은 다 안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후보에 한 표, 정당에 한 표를 투표한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하는 것과 똑같다. 국회 의석은 정당투표율에 따라 배분되는데 단 이때 어느 정도 문턱조항을 두어 군소정당이 마구 난립하는 것을 막는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5%이상 득표 또는 지역구 당선자가 3명 이상인 정당만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한다. 배분된 의석 수 대로 지역구 당선자부터 우선 등원시키고 다음에 비례대표 순서에 따라 등원한다. 만약 정당 배분보다 지역구 당선자가 많은 경우 지역구 당선자 모두를 등원시킨다. 따라서 국회의원 정수가 고정적이지 않고 탄력적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다.


1. 20개 선거구가 있는 (갑)지역이 있다고 하자. 이곳은 A당의 강세지역으로 20석 모두를 A당이 갖고 갔다.


2. 그러나 정당투표에서 A당 54%,  B당 35%,  C당 10%,  D당이 1%를 얻어 비교적 고르게 분포됐다.


3. D당은 정당투표에서 5% 이상 지지를 얻거나 3명 이상의 지역구 당선자를 내지 못했으므로 문턱조항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 받지 못했다.


4.D당이 득표한 1%를 A, B, C당의 득표율에 맞게 다시 분배하니 A당 55%, B당 35%, C당 10%가 되었다.


5. 이에 따라 20석을 배분하면 A당  11석, B당 7석, C당은 2석을 배분 받는다.


6. 그런데  A당은 정당득표율에 따라 배분된 11석 보다 훨씬 많은 20명의 지역구 당선자를 내게 되었다. 이 경우 지역구 당선자 20명 모두를 등원시킨다.


7. 결국 이 지역 선거구는 20석이었으나 최종 당선자는 29명이 된다. 이런 지역이 여러 곳 있으므로  국회의원 정수가 당초보다 늘어난다.


만약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게 되면 실상 기독당 어르신들 같은 정치인이 아니라 유권자인 국민이 유리하게 된다. 우선 나의 소중한 한 표가 찍어도 소용없는 표, 즉 사표(死票)가 될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다. 지금처럼 A당이 되는 것이 싫어서 B당을 찍을 필요가 없다. C당을 지지해서 찍으면 C당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의 여론을 공정하게 반영할 수 있다. 51.6%에는 밀렸지만 48%의 의견도 정당하게 정치자원을 배분받는다.


아울러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가 거의 완벽하게 사라진다. 전국에서 모아진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이 배분되는데 특정지역의 편만 드는 건 정치적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들은 자연히 인기 위주가 아닌 정책선거를 펴게 되고 지역에 매몰되지 않은 참신한 인재들이 정치권에 진입하기 쉬워진다.


비례대표제가 확대되면 안 된다는 주장들이 있다.


첫째, 군소정당이 난립해 정국이 불안해질 수 있다고 한다. 아니다. 지금처럼 영화 같은 상황을 끊이지 않고 연출하는 거대정당들이 그 따위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문턱조항에 따라 득표율이 미미한 정당들을 제외하고 유력한 몇 개의 정당이 서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연립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의 역동성이 나타날 수 있다.


둘째, 비리가 많아진다면서 18대 총선 때 창조한국당이나 19대 총선 때 통합진보당 사례를 드는데, 이것 역시 아니다! 이것도 거대정당들이 할 소리가 아니다. 니들은 얼마나 깨끗하다고.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나쁜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운영 방식과 태도에 있다.


셋째, 지역대표성이 낮아지고 정당 간부들만 득세하게 된다. 아니다. 막말로 지역대표성은 도의원, 시의원, 구의원들에게 주고 국회의원 쯤 되면 국가비전을 보고 일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위에서 예를 들며 설명한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같은 제도는 그런 지역구 선거와 비례대표제의 장점을 모두 갖춘 훌륭한 제도다.


만약 비례대표제가 확대되고 큰 목사님들이 시원하게 베팅 한 번 하시면, 어쩌면 기독당 어르신들 중에서 국회의원이 되시는 분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우려스러운 상황이겠지만 나는 괜찮다고 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역시도 국민의 선택한 결과니까. 그리고 소수지만 아주 훌륭한 정치세력들이 그네들보다 훨씬 많이 의회에 진출해 열심히 정화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공정한 세상을 위해 비례대표제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젊은이들이 있다. 그들이 <비례대표제포럼>이란 이름으로 모여 벌써 행사를 진행한 것이 4회째, 최근 모임의 부제가 “청년, 새 민주주의에 새 희망을 품다!”였다. 이 얼마나 현상의 역설을 반영한 것이고 쥐어짜서라도 희망을 찾아보겠다는 눈물겨운 모습이란 말인가! 한 청년이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여전히 정치에 희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포럼의 고문을 맡고 있는 평화재단 평화연구원의 윤여준 원장. 평생 정치영역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기능과 역할은 여전하기 때문이라고!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기능과 역할은 여전하며,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도 오게 하라는 절대자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인이라면 결코 그것을 멸시하거나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오히려 정치는 그 명령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숭고한 도구인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에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이 때, 세상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비례대표제 확대에 동참할 젊은이가 어디 없을까?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에 집중하여라"


새해가 되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일이 종종 생긴다. 인사와 함께 몇 마디 나누고 나면 금방 어색해져서 재빨리 다음 대화거리를 생각해야 한다. 옳거니! 으레 나오는 질문은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일한다고 하면 상대방은 머뭇거리다 다시 물어본다.

 

“그러면 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어떻게 생활하긴. 인간사 거기서 거긴 것처럼 나도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살아가는 노동자다. 물론 기업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덜 받겠지만, 그래도 내가 일하는 곳은 생긴 지 오래되었고 꾸준하고 든든하게 후원해주시는 분들도 많아서 월급 한 번 밀린 적 없고, 나와 부모님 이렇게 세 식구가 목구멍에 풀칠하기에 딱 좋다!


그런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골룸이 스미골 미혹하듯’이란 속담처럼,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우뚝우뚝 솟아오른다. 그것은 상대적 모자람에 대한 절대적 공포다. TV를 틀면 ‘신입생 여러분의 성적이 낮은 이유는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노트북이 없기 때문’이라거나,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식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세상이다.


아, 말씀으로 극복해야지! 아닌 게 아니라 성도들에게 새해 들어 ‘약속의 말씀’을 뽑도록 하는 교회들이 많다. 성도들은 자신이 뽑은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책상에 붙여놓거나 다이어리에 잘 간직한다. 그리고 한 해를 살면서 힘든 일이 있거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다시금 꺼내 보며 그 의미를 생각한다. 나무랄 수 없는 순수한 마음이다.


그런데 킁킁, 냄새가 난다. 성서의 수많은 말씀 중에서 몇십 또는 몇백 개의 아름다운 말씀을 추려주신 분은 과연 누구실까? 따지고 보면 그도 나와 같은 노동자가 아닌가! 이름 모를 그분의 노력을 생각하니 킁킁대던 코끝이 찡해진다. 내가 말씀을 하나 더 뽑으면, 그분의 수고가 하나 더 늘어날까 염려되어, 나는 차마 말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 성경>을 읽다가 눈과 마음에 들어온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이렇게 적혀 있다.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하고 계신 일에 온전히 집중하여라. 내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로 동요하지 마라.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막상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나는 올 한 해, 이 말씀이 그냥 믿고 싶어졌다.


새해가 밝았다. 해가 떴다가 지고 바람이 불고 마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들은 예로부터 그것들에 숫자를 갖다 붙이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이번에는 2012가 2013으로, 12와 31은 각각 1과 1로 바뀌었다. 변화는 기대를 일으킨다. 회사의 부정과 불의, 그리고 그것들로 인한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기 위해 철탑으로 올라가신 분들에게, 숫자들의 변화가 단지 철탑 위 생활이 더 늘어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자비로우신 여러분,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 한 해도 말씀으로 기운 받아 열심히 활동하는 동네교회청년이 되겠습니다.


동네교회청년의 아류, 그리고 아듀 2012년!


맙소사! 2012년이 저물어간다. 누군가는 사랑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이별을 경험했다. 누군가는 탄생을 기념할 것이고 누군가는 죽음을 애도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은 똑같이 흐르지만 남기고 간 흔적은 모두 다르다. 나에게 있어 2012년은 동네교회청년이 시작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올해 초 아직 날이 쌀쌀할 때, 한 청년의 자취방에서 몇몇이 옹기종기 모여 “교회가 이래서야 쓰겠느냐”며 울분을 토하다 시작한 것이 바로 동네교회청년이다.


생산하려는 의지는 없고 소비만 하려는 세태 속에서, 동네교회청년은 우리에게 허락된 자원을 최대한 짜내어 자발적인 생산물을 만들어내고자 애썼다. 그리 잘되지는 않았지만 지역 현안에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동네를 위한 기도회’가 있었다. 영화 '잼다큐강정' 상영회를 열어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옆 동네인 강정마을의 고통에도 관심어린 시선을 보냈다. 첫 번째 대외공작물로 자평하는 ‘찬란한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 강좌는 나름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후보자들과 그들의 공약을 검토하는 공부모임도 가졌다.


재밌는 일도 있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동네교회청년의 아류들이 등장한 것이다. ‘동네교회처녀’는 비정기적인 여성수다모임으로, 예배 후에 진행되는 성경공부를 종종 거부하고 커피숍으로 몰려가 이야기를 나눈다. 혹자들이 보기에는 벼락 맞을 인간들이지만, 그녀의 결단이 성경공부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동네고기청년’은 매주 토요일 저녁, 한 청년의 자취집에 보여 고기를 구워먹으며 ‘무한도전’을 함께 시청하는 모임이다. 다음번에는 돼지고기를 사다 된장 넣고 삶아 먹을 거란다. 이들 모두 복음을 앞세우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서 복음적이다. 이러한 자생적인 모임이 많이 생겨나길 바란다.


올해 동네교회청년을 하면서 만나게 된 동네청년도 있다.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퍼진 소문을 듣고 관심 있다고 연락하신 분도 있다. 조만간 다 만나볼 생각이다. 새해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함으로써 동네교회청년이 보다 더 보편적인 모임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하겠다. 곧 동네교회청년들이 모두 모여 새해 방향을 결정하게 될텐데 우리들이 다짐했던 첫 마음인 “파벌이 아니라 공동체를 만든다.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린다.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실천한다. 재미있을 때까지만 한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를 까먹지 않고 꼭 필요한 일을 계속해나가겠다.


한 해 동안 별로 시덥지 않은 글에 보내주신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내년에는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해서 보다 나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정말 별 거 없지만 젊은이들의 모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심을 보여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부디 실망하지 마시고 애정을 갖고 도와주시길 부탁드린다.


2012년이 저물어간다. 그건 그거고 이제 2013년이 다가오고 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랑은 악마도 못견디게 해'

청춘들에게 연애협동조합이 필요한 이유


얼마 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협동조합과 교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협동조합에 대한 높은 관심과 열기를 반영하듯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왔다. 그 중에 청년들이 시도해 볼 만한 아이템이 없는지 눈여겨 보았는데 ‘결혼협동조합’이 있었다. 다 아시다시피 요즘 청년들이 결혼하기가 얼마나 힘들며, 또 막상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남의 눈치 보느라 얼마나 쓸 데 없는 비용을 많이 들이는가! 만약 청년들이 한 푼, 두 푼 출자금을 모아 결혼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고, 꼭 필요한 것만 알뜰하게 준비하는 웨딩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서로가 서로의 결혼을 도와준다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차 싶었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고 잠을 자야 꿈을 꾸듯이, 연애부터 해야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오늘날 청춘들이 치솟는 물가, 등록금, 취업난으로 인해 포기했다는 세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연애다. 사랑을 속삭이고 싶지만 핸드폰 비용이 급증할까 겁부터 나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려가면 다음날부터 학생식당의 3,000원 짜리 밥도 부담스러워 1,000원 짜리 라면으로 한 끼 때워야 할지 모른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내 반쪽에 다른 누군가를 들이는 것이 어렵다. 어쩌면 결혼협동조합보다 더욱 절실한 것이 ‘연애협동조합’이다.


상대방을 선택하는 기준도 팍팍해진다. ‘현실‘, ’조건‘, ’능력’ 같은 단어들이 유효하게 사용된다. 그렇다면 인간 세상이 동물의 왕국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언젠가 짝짓기 방송에서, 좋은 조건을 가진 여성이 대학에 가기 보다는 기술직을 선택해 열심히 일하는 (그러나 내 기억에 잘생긴) 남성과 짝이 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복음’을 들은 가난한 청춘들은 아마 마음이 따뜻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들으니 그 여성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어렵사리 고백했는데, 방송에서 자신에게 구애했던, 조건이 좋은 다른 남성과 만나게 되었단다. 아, 최종선택은 ‘이상’이었으나, 마지막 최종선택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분들에게 돌을 던질 생각이 추호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서운함을 토로한 누리꾼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이럴 때마다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다. 예전에 아프리카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 현지인 선교사가 한국에 오셔서 그 분을 모시고 여기 저기 다닐 일이 있었다. 좀 친해졌다 싶으니 돌아갈 날이 됐다. 그래서 아쉬움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가 자신의 러브스토리를 이야기해 주셨다. 지금 자기 아내를 놓고 경쟁했던 사람은 그 마을에서 매우 유력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자기와 결혼한다고 했단다. 본인조차도 이해가 안 되서 왜 나랑 결혼하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I love you", 한국말로 ”너.를.사.랑.해“라는 뜻이다. 흔히들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한다. 2012년 IMF 기준으로 보면 15위인데, 15위라고 하면 뭔가 모양이 빠지니 10위권이라고 하나보다. 어쨌든 대한민국이 그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보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일지는 몰라도, 백범 선생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문화선진국이라고 과연 할 수 있을까?


성서는 악마를 ‘미혹케 하는 영’이라고 한다. ‘미혹’이 무슨 말인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청춘들은 그 미혹케 하는 영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연애를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인가? 조건이 구리면, 능력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고 미혹케 하는 영을 거부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자, 지금부터 저의 선동에 눈을 기울여 주시기 바란다.


핸드폰 비용이 걱정된다면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하고, 대신에 만나서 대화를 많이 하자. 늘어나는 문자비가 부담스럽다면 ‘카카오’라는 회사에서 만든 앱을 소개해줄 수도 있다. 그리고 매번 고급 레스토랑이나 비싼 찻집에 갈 필요가 없다. 동네 시장에 가서 국수를 사먹고 공공도서관에 가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며 책을 읽어도 행복하다. 미혹케 하는 영이 강요하는 기념일을 거부하고 정말 특별한 날을 만들어 보자. 뭣이! 찌질하다고? 지금 당장 저항하시라. 지금 미혹케 하는 영이 당신 앞에 버티고 앉아 우는 사자처럼 당신을 덮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수가 청춘콘서트 때마다 했던 말마따나, ‘우리 용기를 내자!’, ‘포기하지 말고 사랑하자!’

상대방이 진짜 아니면 모를까, 어떤 인간이 참 괜찮고 좋은데 다른 무엇 때문에 망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면 진짜, 농담 아니라, 연애협동조합이라도 만들어보자. C. S 루이스는 악마는 무시당하면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가 미혹케 하는 영을 무시하고 사랑하기 시작할 때 거대하게 보이는 장벽은 균열이 생겨 마침내 무너질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악랄한 저항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12월이다. 마침 눈도 내린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에 꽤나 좋은 상황이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그리고 사랑!


청년부 임원 예찬


빼빼로든 가래떡이든 뭔가 지나간 흔적들을 보니 벌써 11월 하고도 여러 날이 지났다. 아마 각 교회 청년부는 대통령 선거만큼 중요한(!) 임원 선거를 앞두고 있을 게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청년들이 청년부에서 임원이 되기 위해 많이 도전해보면 좋겠다는 것이다. 해봤자 돈 한 푼 안 생기고 오히려 돈 쓸 일이 늘어나는 것, 남들이 자기 계발에 힘쓸 시간에 나는 그 시간을 쪼개서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 세상이 인정해주는 버젓한 스펙이 되기는커녕 나중에 취업할 때 이력서에 한 줄 쓰기도 애매한 것이 청년부 임원이다. 그런데 그걸 하라고?


청년부 임원은 저평가되는 것 같다. 관점을 바꿔보면 좋은 것도 많이 있다. 우선 청년부 임원이 되면 일하는 방법을 많이 배울 수 있다. 나도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고 배울 것투성이인 사람이지만, 그래도 지금 일하는 것들의 기초는 모두 청년부 임원을 하며 배운 것이다. 


‘너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니까 그렇지 않냐고?’ 


일반회사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기획하고 회의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청년부에서 하는 일은 그 범위나 수준이 사회에 비해 영세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러니까 아주 실속이 없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청년부 임원을 하면 공동체적 리더십을 연마할 수 있다. 적게는 십 수 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이 달하는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분명 귀중한 경험이다. 최근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한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양희송 님은 예전에 청년사역자 컨퍼런스에서 청년부 회장들을 기초의회에 출마시키자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청년부 회장이라면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고 민주적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투명하게 재정을 운영하는 훈련이 된 사람으로서 충분히 기초의회 의원 정도는 될 자질이 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 아닌가? 지역 토호보다야 일만 배 낫지!


뭐 꼭 그런 정치적 야심(!)이 있지 않더라도 청년부 임원이 되어 1년 간 자신의 삶을 공동체를 위해 바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그것도 아주 고급가치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를 요청받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근거는 없지만 이기적인 세상은 이제 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온 법이니까. 그 이후에 분명히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텐데 그 때는 분명 세상이 공동체적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애타게 찾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청년부 임원으로 헌신했던 청년들도 ‘삼고초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청년부 임원이 되면 잃는 것도 분명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공평해도 너무 공평하다. 얻는 것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쫄지 말고 많이들 도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약에 진짜 청년부 임원으로 뽑히게 되면, 실제 임기에 돌입하기 전까지 얼마동안 시간이 주어질 거다. 이때를 조심해라. 아마 여기저기에서 벌써부터 일을 시키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을 거다. 웬만하면 딱 잘라 거절하기 바란다. 지금은 최대한 공부하고 토론하며 내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희망제작소가 펴낸 ‘인수위 67일이 정권 5년보다 크다’라는 책이 있다. 말 그대로 정권이 5년 임기동안 추진하는 정책의 방향은 사실 두 달 남짓한 인수위 시절에 다 결정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예를 들어 참여정부는 출범을 앞두고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실상은 삼성의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에 크게 의존했다는 설이 있다. 심지어 참여정부라는 이름도 삼성경제연구소가 지어줬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그런 맥락에서 참여정부가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신자유주의에 치우친 정책을 펼친 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다소 거창하게 이야기 했지만 어쨌든 교회와 청년부는 새로 뽑힌 임원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줘야한다. 임원들이 그저 담당 목회자가 결정한 일을 뒤치다꺼리나 하거나, 올해 했던 일들을 내년에도 그대로 답습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은 새로 뽑힌 임원들이 공부하고 토론하며 내년을 준비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내가 섬기는 교회 청년부는 이미 임원선거를 치렀다. 여러분께는 임원이 돼보라고 하면서 나는 쏙 빠져나가면 ‘언행일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서 밝히기 쑥스럽지만 나도 한 자리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동네교회청년’ 모임에 참여하는 친구들 여럿이 임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미 매주 한 번 씩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며 내년도 구상을 짜는 시간을 시작했다. 내년 1년보다 남은 한 달여 시간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청년들도 하나님과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위해 청년부 임원에 도전해보시길 강력히 추천한다.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가 말하는 것


지난 글에서 ‘열린지식나눔 : 평범한 상상’이 열린다고 소개한 바 있다. 드디어 그 첫 번째 시간 ‘찬란한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의 막이 올랐다. 한 때 15kg 감량 경험자로서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냥 토끼 같은 아내의 남편이자 여우같은 아기의 아버지인 강사님을 모셨다. 10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망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대박’까지는 아니지만 ‘중박’정도는 된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찬란한 한국교회의, 흰 역사도 아닌 검은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것일까?


고리타분한 질문을 던져보자. 역사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역사 교과서에서 한번쯤 봤을법한 카(Edward Hallet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한편 ‘유희하는 인간’이란 개념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가(Johan Huizinga)는 "역사란 하나의 문화가 자신들의 과거에 관해서 설명하는 하나의 정신형식이다"라고 어려운 말을 썼다. 아따, 역사 그 자체에 대한 해석도 참 가지가지고 어렵다.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역사는 해석'이라는 것이다. 사건 그 자체로써의 역사는 없다. 가치가 진공상태인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럼 역사는 어떻게 해석될까? 우선 역사는 텍스트(Text)를 통해 해석된다. 텍스트란 ‘해석되기 이전의 원천자료’를 말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텍스트는 기록이나 증언, 그리고 몇 년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규명된 일들이다. 그런데 그 텍스트는 컨텍스트(Context)에 따라 해석된다. 컨텍스트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상황’이나 ‘맥락’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내용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예수의 삶을 각각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썼기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컨텍스트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 없이 바로 '내가 지금 살아가는 자리'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했다고 하자. 작사가가 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나 싶을 정도로 세상 모든 이별노래가 다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극복하기 어려운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성경 어디를 펴 봐도 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위기가 지나가고 삶이 편안해지면 그때의 그 말씀을 다시 읽어도 그냥 무덤덤하게 느껴진다.


역사도 그렇다. 어떤 사건이 내게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한국교회가 한참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을 때라면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한국교회가 개똥밭을 뒹구는 모습이 ‘왕성’할 때는 역사를 통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고, 잘못이 무엇인지 바라봐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찬란한 한국교회의, 흰 역사가 아니라 검은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인 것이다.


1주차 때 한국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2주차 때 한국교회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배우다보니 어느덧 4주 과정으로 짜여진 ‘찬란한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도 절반의 시간이 지났다. 강사님은 집에 많이 남아있다면서, 강의를 들으러 온 분들에게 자신의 논문을 손수 나눠주기도 했다. 딱딱해서 냄비받침으로 쓰기에 좋겠다고 하니 본인의 친구 중에 재떨이로 쓰는 ‘용자’가 있단다. 참여하신 분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조금 어렵긴 하지만 이야기처럼 술술 풀어줘서 재밌다고 하신다. 그저 고마울 뿐. 강의가 끝난 후 나누는 찐한 ‘코이노니아’ 시간도 참 좋다.


방방곡곡의 동네교회청년 여러분, 어떠신가? 아직 절반이 남아 있다. 3주차 때는 독재세력과의 야합과 빨갱이 논쟁에 대해, 마지막 4주차 때는 그 엄혹했던 시절의 기독청년운동을 통해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볼 심산이다. 강사님의 말마따나 지금부터가 우리가 살아가는 ‘본 게임’이다.


나눔의 '평상'에서 열매 맺는 꿈


‘동네교회청년’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로 꼽은 것이 ‘공부’였다. 고리타분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동네와 더불어 사는 교회를 이루겠다’는 당찬 포부에 비하면, 솔직히 아는 게 없었다. (없어도, 너~무 없어!)


흔히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혼자서 책을 읽는 것도 훌륭한 공부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타인과 끊임없는 관계를 통해 공부함으로써 또 다른 배움을 얻을 수도 있다. <88만원 세대>로 유명해진 우석훈은, 오건호의 책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의 추천사에서, 자신들이 과거에 몸담았던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추억하고 있다.


“칸막이 없이 많은 연구원들은 매일 토론을 했고, 개별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정보를 교류하면서 종합 능력이 아주 높아졌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일이었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띵! 하고 머리 위에 백열등이 커졌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 모두는 타인에 비해 더 많이 관심을 갖는 일이 있고, 그래서 타인보다 좀 더 잘하는 일이 한 가지씩은 있다. 그것들을 함께 나눈다면 어떨까?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에게 선생이 되어주고, 학생이 되어주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어국문학과에 갓 입학한 신입생은 아직 녹슬지 않은 글쓰기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여덟 학기동안 착실하게 등록금을 꼬라박은 정치학과 졸업생은 우리네 국회의원님들을 뽑는 방식으로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 정도는 이야기 할 수 있다. 새로운 꿈을 찾아 안정된 직장을 떠나 동네 커피가게에서 일한 지 어언 일 년이 다 되가는 사람이 남들보다 커피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로가 갖고 있는 지혜를 나눔으로써, 어느새 글쓰기에 대해 눈을 뜨고,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며, 이 커피와 저 커피의 차이는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그래서 멍석 한 번 깔아보기로 했다. 서로의 지혜를 나누는 열린 시간을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시간을 ‘평범한 상상’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줄인 이름은 ‘평상’. 누구나 와서 먹고 놀다 갈 수 있는 평상 같은 모임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이제 ‘동네교회청년’은 첫 번째 ‘평범한 상상’을 시작하려고 한다. 10월 18일부터 11월 8일까지, 4주 동안 매주 목요일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배우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름 하여 “찬란한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다. 이야기꾼은 학부 때 재수강으로 들어간 한국교회사 수업에 흥미를 느껴, 지금도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 동네교회 형이다.


‘평범한 상상’의 시작을 알리니, 친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면식조차 없는 분들도 연락이 온다. 얼떨떨하고, 긴장된다. 솔직히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제발 뜻 깊은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지금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은 얼마나 자애로운 성품의 소유자일까? 부디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리고 만에 하나 ‘평범한 상상’에 참여하기 원하시는 분이 계시면 동네교회청년 블로그(ncyzine.tistory.com)에서 신청하실 수 있다.


<대중의 지혜>의 저자, 제임스 서로위키(James Surowiecki)는 “평범한 다수가 똑똑한 소수보다 낫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평범한 다수’가 서로 지혜를 나누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더 이상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희망’을 만나다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기윤실은 ‘Talk, Pray, Vote 캠페인’을 벌였다. 눈치 채셨다시피 모 통신사 광고카피를 패러디한 것이다. 내용인즉슨 기독교인들이 투표를 포기하거나, 누가 시키는대로 ‘묻지마 투표’를 하지 말고, 표어 그대로 ‘선거에 대해 이야기 하고, 누구를 뽑을지 기도한 후, 투표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열심히 캠페인을 진행하던 어느 날 사무실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몇몇 청년들이 자기 동네에서 ‘Talk, Pray, Vote 캠페인’을 홍보하고 싶은데, 이와 관련해서 사무실을 방문해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우리 동네 바로 옆동네 사람이다. 방문해도 되냐고?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로부터 며칠 후, 일단의 청년들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점심시간이었지만 이들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해서 배고픔도 뒤로 미뤄둔 채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것이 ‘희망’과의 첫 만남이었다.


‘희망’은 복음주의적인 책읽기 모임으로 시작해, 차츰 차츰 교회개혁과 사회참여를 꿈꾸며 활동을 모색하는 모임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지금도 매주 토요일마다 십 수 명의 청년들이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며, 때로는 근처에 있는 장애인 시설에 가서 봉사활동도 하고, 여러 모임과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열심을 내고 있다. ‘희망’의 싸이월드 클럽(club.cyworld.com/hopenuri)에 적혀있는 소개 글을 옮겨본다.


보편적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생활형 공동체를 지향하는 ‘희망’은 로잔언약의 그것을 기초로 하며 세속적 질서를 거스르고 찬 진리의 길을 좇습니다. 그 길은 출애굽의 길이요, 사도들의 행진이며, 다른 이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입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한 진정한 연대, 그것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시작이며 끝일 것입니다. 우리의 시대를 읽고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격려, 지지하여 인생으로 역사를 쓰는 이곳 바로 희망입니다.


희망에서 온 청년들과 만나보니, 서로 아직은 비루한 청년이지만(같이 엮어서 미안합니다) 작금의 한국교회와 사회의 모습에 분노와 걱정을 동시에 하며,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대안적 삶을 고민하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어 기쁘고 반가웠다. 내가 희망 모임에 놀러간 적도 있고, 동네교회청년 모임에 희망 청년들을 초청할 생각도 갖고 있다. 아, 희망 청년인 김 모 군과는 ‘제주평화순례’에 같이 갔었는데 서로 ‘삼촌’이라 부르는 사이가 됐다(제주도 사람들은 친근감의 표시로 서로를 ‘삼촌’이라 부른다). 


참으로 기이하게도, 청년들이 모여 무언가 해보려 하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그것도 바로 옆동네에서,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서로에게 큰 격려요 위로였다. 앞으로 ‘희망’과 ‘동네교회청년’은 꾸준히 우정을 쌓으며, 동네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협력하려고 한다. 


아마 이 땅 방방곡곡에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생동하고 있는 청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비록 우리들의 앞날이 명확하지 않고, 때로는 생각만큼 일이 술술 풀리지 않더라도, 우리 낙담하지 말자. 오히려 이천 여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살았던 요셉과 마리아네 첫째 아들을 본받아, 그 ‘불확실성’ 속으로 우리의 젊음을 내던져버리자. 아직, 희망은 있다.


"우리 동네를 위해 기도해보셨나요?"


기독청년아카데미와 성서한국이 공동으로 기획한 ‘새로운 주체 생성을 위한 기독운동론’ 강의를 들으러 갔었다. 4주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인데 송강호 박사가 ‘새로운 현장운동의 생성’을 주제로,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강의를 얼마 앞두고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송 박사가 구속된 것이다(송 박사는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다, 주여!).


송 박사를 대신해서 ‘개척자들’ 이형우 활동가가 강의를 했다. 이 활동가와 송 박사는 교회에서 청년과 전도사로 처음 만났다고 했다. 당시 송강호 전도사는 교회를 설득해 청년들을 이끌고 아시아 지역으로 해외단기선교를 다녀왔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교회에서 해외로 단기선교를 가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것만 해도 의미있는 일인데, 바로 다음 주일 저녁부터 매 주마다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후에 송 박사가 교회를 사임하고 유학을 가게 되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랬단다. “전쟁이 터지면 그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운명의 장난인지 하나님의 섭리인지 바로 몇 주 뒤 르완다 내전이 터졌다. 청년 몇 명이 바로 송 박사를 찾아갔다. 송 박사도 앞날이 보장돼 있던 학업을 포기했다. 청년들과 한 약속 때문이었단다. 그렇게 몇 명의 청년들이 전쟁의 현장으로 갔다. 통제 때문에 분쟁지역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외곽에서 난민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그것이 ‘개척자들’의 시작이었다.


매주 모이던 기도 모임은 ‘세계를 위한 기도 모임’(세기모)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개척자들’이 비록 작은 규모라 할지라도, 영속적으로 생명력 있는 활동을, 왕성하게 할 수 있는 에네르기는 무엇일까? 나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사람들을 만나며 바쁘게 지내셨지만, 늦은 밤 또는 이른 새벽에 남몰래 기도하며 새 힘을 얻으셨을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시다시피, 동네에 살며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자신들이 신앙하는 바를 실천에 옮겨보고자 모여들었다. 우리들이 반짝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생명력 있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나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진부해 보이긴 해도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모여 기도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동네를 위한 기도회'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많은 기도 모임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 틈새를 파고 들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사람,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 구청장과 구의원 같은 동네 정치인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을 갖고자 한다.


‘동네를 위한 기도회’를 어떻게 진행할지, 아직은 고민을 통해 나름의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익숙했던 기도 모임의 모습에 대해 하나씩 되짚어보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도회를 시작하며 찬양을 부르는 것이 더 좋은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첫 모임 때는 찬양을 부르지 않았고, 두 번째 모임 때는 간단하게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했다.


모이면 우선 이야기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 우리 동네에 대해서 나 자신이 요즘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말하고, 무엇을 기도하면 좋겠는지 나눈다. 중언부언 하는 것을 피하려고 해서, 오히려 기도하는 시간은 길지 않다. 침묵 속에서 서로가 내놓은 기도 제목을 하나씩 집중해서 기도하고, 기도를 마친 사람은 눈을 뜨고 조용히 기다린다. 마지막 사람까지 모두 눈을 뜨면 다시 새로운 기도 내용을 가지고 기도한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동네를 위한 기도회’가 잘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동네에서 하기 원하시는 일들을 깨닫게 되고, 하게 되길 바란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동네를 위한 기도회’가 생기길 기대해본다.


"등짝 때리지 마세요, 살도, 삶도 아프다고요"


지난달 18일, 동교동 카페바인에서 열린 ‘청년정치토크파티’에 다녀왔다. 하루 종일 출장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갔다 오느라 피곤하기도 했지만, 이대로 집에 가봤자 널부러져 있는 것밖에 더하겠는가? 차라리 여러 청년들을 만나보자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1부는 청년 국회의원 장하나 씨의 이야기 시간이었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백팩을 매고 온 그는, 사실 자신이 그동안 청년문제를 놓고 싸우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청년비례대표를 준비하며 많은 문제를 접하고 공감하게 됐고 앞으로 열심히 활동하겠다고 했다. 순진해보이지만 핵심을 콕콕 찌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기야 개원 전부터 거물급 정치선배와 거대 이동통신사들을 상대로 보기 좋게 쓴 소리를 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었다. 앞으로 좋은 활약을 펼쳐주기를 기대한다.


2부는 테이블토크로 진행했다. 각각 대학, 정치, 주거, 청년&공동체를 주제로 관심 있는 테이블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나는 주거테이블에 앉았다. 예상대로 여러 가지 마음 짠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싼 집을 찾아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였는데 결국 지하실을 벗어날 수 없었고, 거기서도 곰팡이는 변함없이 신실하게 친구가 되어주었다는 이야기였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저는 ‘동네교회청년’인데요. 주거문제가 심각하고, 특히 살 집이 없어 청년들이 결혼을 늦추는 실정이잖아요.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뭔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어요. 요즘 큰 교회들이 많게는 수천억 원씩 돈을 들여 교회당을 짓는다고 욕을 많이 먹고 있는데요. 예배는 근처 학교나 강당을 빌려서 드리고, 차라리 그 돈으로 작은 아파트를 지어 결혼하는 청년들에게 아주 싼 값에 살게 해주면 어떨까요? 계약기간은 다른 신혼부부를 위해 딱 2년만(누군가 너무 짧다고 했다). 2년만 주거문제에서 해방 돼도 그 가정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째째하게 우리교회 나오라는 소리는 하지 말고요.”


순간 거짓말을 아주 조금만 보태서 함께 둘러 앉아있던 청년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우와! 그런 교회가 있으면 한번 가보고 싶네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성별 평균 초혼연령은 여성이 29.1세, 남성이 31.9세로 조사됐다. 지난 10년 동안 차츰차츰 높아진 결과다. 그만큼 결혼하기 점점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통계는 통계일 뿐, 내 주위에 29.1세 여성과 31.9세 남성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많은 청년들은 결혼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청년들이 결혼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살 집이 없다는 것이다. 아는 선배의 친구는 결혼을 앞두고 살 집을 구하지 못해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북한산에 올랐다가 산 아래 수많은 집을 보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렇게 집이 많은데 내가 살 집 하나가 없다니!” 나중에 들어보니 결국 그 분은 겨우 겨우 집을 구해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내 주변에 많은 청년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불안해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왜 결혼 안하냐고 성화다. 심지어 등짝을 마구 후려치기도 하신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것도 아니다. 만에 하나 천신만고 끝에 결혼을 한다고 해도 축의금을 많이 낼 것 같지도 않다. 아무개 목사님은 청년들이 나라 생각은 하지 않고 이기적이라며 욕한다. 아, 서럽고 억울하다.


톡 까놓고 이야기해서, 더 큰 교회당이 없어서 예배를 못 드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오히려 욕먹고, 싸우는 모습도 봐야 하는 부정적인 부분도 많다. 그러나 청년들은 집이 없어 결혼을 못하는 현실이다. 이것은 청년들의 능력과 이기심을 훨씬 벗어난 문제다. 만약 교회가 우리사회의 책임 있는 집단으로서, 교회당을 짓는 대신에 그 돈으로 아파트를 지어 청년들에게, 신혼부부들에게 싼 값에 살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예배는 근처 학교나 강당을 빌려서 드려도 되지 않을까?


말도 안돼는 소리라고? 혹시 들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가? 어쨌든 그렇게 해줄 게 아니라면, 내 결혼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지 마시고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라. 그리고 내 등짝, 후려치지 마시라. 아, 아프다고요!


이전 글이 명예훼손 게시물이라고 삭제요청 당해서 다시 올립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ㅋㅋㅋ




동네·교회·청년


교회가 있는 동네는 과연 행복할까? 대답은 ‘글쎄올시다.’ 크고 으리으리하게 지어놓은 교회라 할지라도, 일주일에 몇 번 예배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드나들기 쉽지 않고, 그나마도 굳게 잠겨 있을 때가 많아서 행여 지나가다 ‘급변’을 만나도 화장실조차 이용하기 어렵다. 널찍한 주차공간을 지역민에게 제공하기도 하지만 주말마다 차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교회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할 일이 생기면 동네 시장보다는 봉고차 타고 대형마트로 가서 값싸게 구입하는 ‘뱀 같은 지혜’를 발휘한다. 본의 아니게 각종 소음을 일으켜 종종 경찰이 출동하기도 한다. 미루어 보건대 여러 모습으로 행해지는 분투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동네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개교회 상황이 이런데, 과연 한국교회가 있어서 대한민국은 행복할까? 2010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교회 신뢰도 조사’에서 고작 17.6%가 한국교회를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지나가는 사람 열 명을 붙잡고 물으면 한 명 내지 두 명만이 한국교회를 신뢰하고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모름지기 종교란 신성하고 고상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답지 못한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돈 문제, 성범죄, 권력에 아첨하는 헛소리, 어설픈 성공 지상주의, 몰상식한 전도행태 등은 차라리 패악에 가깝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람들은 서서히 교회를 외면하고 있고, 특히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는 청년들을 기필코 가르쳐야 할 존재이자, 어떤 목표 달성을 위해 동원해야 될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그저 잘 웃고, 잘 울고, 착한 말 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만 믿음이 좋은 청년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똑똑한 아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착한 아이들은 속이 터진다. 나는 착한 아이인지라 언제부턴가 주일 오후가 되면 친구들과 모여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런 저런 푸념을 늘어놓고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일이 많아졌다. 기껏해야 ‘동네교회청년’인 주제에.


그러다 문득,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동네교회청년’이라는 말에 해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교회청년’, 해체해 보면 세 단어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동네’, ‘교회’, ‘청년’.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또는 믿는 우리가 앞으로 집중해야 할 당면 과제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흔히 통용되는 ‘세상 구원’이라는 모호한 외침보다는, 차라리 ‘○○동을 섬기자’는 것이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만일 ‘교회청년’들이 작심하고 달려들어 ‘동네’를 섬긴다면, 세상은 몰라도 동네를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청년들이 한국교회에 대해 세심하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한[각주:1] 대표회장 선거에서 금권선거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홍대 쪽에 로운 교회가 생기는 것이 왜 문제인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분노할 줄 알고, 해결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몇몇 사람에게는 무척 불편한 일이겠지만 한국교회 전체로 봤을 때,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대단한 유익이 될 것이다.


아울러 교회 안팎의 구분을 넘어 청년세대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보자. 등록금이 너무 비싸 아르바이트를 하고, 고약한 사장을 만나 급여를 제대로 못 받고, 그 와중에도 악착같이 공부했어야 하는데 성적이 떨어져 기숙사에서 쫓겨나고, 저렴한 셋집을 찾다보니 지금보다 훨씬 먼 곳으로 이사 가야하고, 이런저런 일들로 결혼준비는커녕 연애도 버거운 불편한 진실은 교회청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이 일을 해결하는데 교회 청년들이 힘을 보탠다면 해결도 빠르고, 방법도 더 좋게 진행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과 신뢰도 향상될 거라 본다. ·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나와 친구들은 동네, 교회, 청년을 주제로 공부하고, 알게 된 문제에 대해 기도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찾아 실천하는 ‘동네교회청년’이 되기로 했다. 이것이야말로 ‘소금과 빛이 되어서 착한 행실로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듯 작지만 의미 있는 모임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며 감히 졸문을 통해 생각과 대안들을 나누고자 한다. 많이 애정해주시고 간섭해주시라. 맑스가 그랬던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첫 번째 글을 맺으며, 이 필자 간절히 외친다. 방방곡곡의 ‘동네교회청년’이여, 일어나 함께 가자!



  1. 명예훼손이라며 게시물을 막아서 의도적으로 낸 오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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