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고난주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택을 궁금해했다. 그가 분연히 일어나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고쳐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대로 그가 이렇게 더러운 곳에 발을 담그지 말고 좋은 선생으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뭔가를 발표할 거란 소식이 들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 섞인 기대를 내뿜으며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드디어 굳게 다물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마태복음 5장 3~10절, 새번역


예수가 그의 지지자들에게 한 말이다. 그의 ‘출마’를 기대했던 사람들로서는 다소 맥 빠지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고심 끝에 완성한 '출마선언'이었다. 그의 말은 이런 것이다. “내가 생각해보니 ‘복(福)’ 받는 인생이란 이런 거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 거다. 그러니 여기 모인 당신들도 함께 이렇게 살자.” 사실 이 ‘출마선언 사건’은 ‘고난과 죽음 사건’과 더불어 예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극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두 사건은 응당 맞닿아 있다.


예수는 그 후부터 이 선언에 걸맞게 복을 구하는, 말하자면 ‘구복인생’을 살았다. 몇 해에 걸친 구복인생의 절정은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일주일이지 않나 싶다. 오늘날 예수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보낸 그 마지막 일주일을 특별히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 그 기간을 ‘고난주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기억하고 지킨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에 담긴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 놓치지 않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 고난주간을 지내며 한 교회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교회는 비교적 건실한 공동체였고 담임자는 양식이 있는 유력한 사람이었다. 그 교회에서 고난주간을 맞아 간증집회를 열게 되었다. 초청된 강사는 어려운 역경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나름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그분 개인의 신앙적 경험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이며 그가 불굴의 노력을 기울인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해 보였다.


그런데 그 자신의 경험이어야 할 것을 ‘복’으로 규정하고 집회에 온 사람들 모두에게 일반화시키려 하면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꽤 괜찮은 그 공동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하루하루 들려오는 소식을 도무지 믿을 수 없고 가만히 있자니 너무 속이 상해 결국 한번 가보았다. 직접 보고 들으니 이것은 거의 ‘참사’나 다름없었다.


우선 그는 ‘일천번제’라고 이름 붙여진, 1,000번의 예배를 드리라고 권했다. 자신은 이미 ‘오천번제’ 가까이 드리고 있으며 목표는 ‘일만번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예배 한 번 당 10,000원씩 헌금을 드리라고 했다. 자기 주변에는 30,000원씩 내는 사람도 있는데 일단 기준은 10,000원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개인당 1,000개의 헌금봉투를 묶음으로 준비하라고 했다. 1,000원은 내지 말라고 했다. 1,000원과 10,000원이 같겠냐고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것이 바로 ‘막말’이다.


'소망의 십일조’라는 신조어도 들었다. ‘소망’은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 소중한 가치이고 ‘십일조’ 역시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의무다. 맛있는 음식도 섞으면 입도 못 댈 잡탕이 되듯이, 두 단어가 결합되자 해괴망측한 뜻이 되어버렸다. 즉 1억 원을 벌고 싶으면 먼저 그 십 분의 일인 1,000만 원을 헌금하라는 말이었다. 빚을 내서라도 먼저 하라고 했다. 십일조는 꼭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에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물권(物權)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예수를 ‘이런 분이다’라고 말하기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런 분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비교적 쉽다. 일종의 ‘부정의 부정’인 것이다. 예수는, 내 장담하건대, 예배 1회당 헌금은 1만 원을 해야 한다느니, 십일조는 빚을 내서라도 먼저 내라느니, 그래야 사업도 성공하고 자식도 복 받는다느니, 이따위 쓰레기 태우는 소리를 하실 분이 절대 아니다. 사기를 치더라도 적당히 하고, 미치더라도 곱게 미쳐야 한다.


궤변이 끝날 때마다 그는 몇 번이고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다른 때도 아니고, ‘고난주간’이기에 더욱 그랬다. 고난주간에 예수는 어떤 일을 겪으셨나! 폭행을 동반한 납치와 강제구금, 불공정한 재판과정에서 받은 사형선고, 다시금 가해진 폭행, 강제탈의, 모욕과 조롱, 잔인한 사형 집행과 그에 따른 쇼크사! 물론 우리는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믿음을 다해 고백하며 그에 걸맞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 고난주간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보고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예수는 지금도! 여전히! 완전하게 발가벗겨진 채, 조롱당하고, 처 맞고 있었다!


바로 이 고난주간에!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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