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있다고 해서 동네가 행복할 일이 별로 없는 요상한 세상 속에서, 사심 없이 동네를 섬겨보겠다며 동네교회청년을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습니다. 그간의 활동을 정리해보고 앞 일을 모색할 때입니다.

때마침 선교학을 공부하시는 손승진 선생께서 출국하시는 것을 기념하여 "예수님의 선교와 동네 선교"라는 조촐한 강연을 열었습니다. 늦더위를 무색케 할 무시무시한 공포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했던, 충격적 강연 내용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모두 다 적지는 못했어요 ㅋㅋㅋ)


*  *  *

예수님의 선교와 동네 선교
- 일시 : 2013년 8월 24일(토) 오후 6시 30분
- 장소 : 산타하우스

 
저에게 언제가는 부탁을 할 거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할 줄은 몰랐습니다. (웃음)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웃음) 그래도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오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이름이 동네교회청년입니다. 동네, 교회, 청년, 이렇게 세 가지를 놓고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네에서 살고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뭘 할 것인지 고민해보면, 어쩔 수 없이 제가 아는대로 말하면, '선교'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임의 제목을 "예수님의 선교와 동네 선교"로 정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선교'라고 제목을 정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선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결국 우리가 동네에서 벌이는 행동과 실천들이 무엇을 닮아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선교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선교를 하셨나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공부만 했습니다. 실천에 있어서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여러 번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거든요. 예수님은 가르침과 실천을 따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정말 무엇을 하면 좋을까 같이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선교를 하셨나
 
오늘날 우리 시대를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의 시대라고 합니다. 상투적인 말입니다. 1970년대, 1980년대 부터 나왔던 말이죠. 세계화, 지구촌화 등 표현만 달랐지 이미 나왔던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동네도 글로벌화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은평구를 보면 인종이 참 다양해졌다는 것입니다. 또 동네에 
다국적기업이 운영하는 커피숍이 생기고, 커다란 쇼핑몰이 들어왔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 동네가 변해가는 모습도 글로벌화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어땠을까요? 예수님의 시대도 비슷한 변화의 물결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는 로마의 시대였고, 또 국제화의 시대였습니다. 로마, 에베소 같은 도시에는 이미 많은 외국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도 말할 것도 없고요. 

또 한 가지 재밌는 것이, 예수님의 시대는 재개발과 건축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헤롯 대왕이 아주 나쁜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대왕'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가 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아주 많이 남겼거든요. 많은 학자들이 목수였던 요셉이 대규모 건축이 이뤄지는 지역에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것으로 예상합니다. 


예수님이 살던 가버나움, 나사렛 위쪽에 세포리스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그 위쪽에 가이사랴 빌립보, 또 그 옆에는 가이사라는 해안도시도 아주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활동은 그런 큰 도시들을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신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활동은 변두리 지역에서, 그 중에서도 경제활동이 왕성한 곳이 아니라 소외된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활동은 아주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치유와 기적을 베푸신 것 같지만, 그를 통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세요. 기존 권력과 종교와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운동'입니다. 죄사함을 선포하고 돌이키는 삶에 초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위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가족들은 숨겨주고 싶고, 마을사람들은 내쫓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적인 영혼구원에만 치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영혼구원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물론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구원에만 몰입함으로써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혼구원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국이 왔다, 회개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예를 들어 '삭개오'처럼 자신의 삶을 돌이키게 됩니다.

예수님의 선교에서 긍정적 부분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영혼구원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오늘날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우리의 성실한 자세입니다.


동네교회청년, 무엇을 해야할까

선교는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선교사가 선교를 간다고 하면 그 곳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이해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합니다. 말씀 선포는 당연히 하는 것이고요.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이 지탄을 받는 것은 언어도 안 되고, 문화적 이해도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말씀이 잘 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 대해 더 고민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활동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활동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네교회청년이라고 모여서 이 동네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복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동시에 여러분의 활동을 통해서 공공영역의 구원도 증진되어야 합니다. 동네선교에는 분명히 공공성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구조적인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특히 가난과 권력의 불평등 문제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가난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가난이 잘 해결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이후에, 원래대로라면 가난이 없어져야 합니다. 신명기 15장 4절에 보면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어요.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시는 박동현 선생이 성경에 나오는 가난에 대한 구절을 다 모아놓으셨습니다. 엄청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고 오히려 성실함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서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복받는 부분에만 주목을 할까요?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지 않는 걸까요?

하나님이 가난을 많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가난에서 자유케 해주시는 것 뿐만 아니라, 가난으로부터 오는 자유를 맛보게 하시려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힘 없는 자와 함께 함으로써 주어지는 자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호혜적인 차원이 아니라, 함께 할 때에만 우리에게 오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선교에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농촌이나 어촌이나 연대하려는 시도들이 한국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그게 '선교'라고 본 것이지요. 1928년에 예루살렘에서 세계 선교사 대회가 있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5명이 대표로 참가합니다.그 중 한명이 YMCA 총무였던 신흥우인데 그 때 한 발언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인식이 이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회적 구속 사업에 있어서 사실 그대로 증인이 될 수 있다. … 만약 교회가 이에 실패하여 농민들이 그리스도에게 기대하는바 사회적 구원과 민족적 구원이 제거된다면 교회는 전적으로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구원의 개념을 너무 위축되서 사용시켜 사용합니다. 그러나 별로 배움이 없었던 우리 선배들은 성경만 보고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구원과 민족적 구원이 제거된다면 그 책임을 교회가 물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선교

예수님의 선교사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한 말을 하십니다. 바로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인데요. 예전에 병자는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심과 동시에 늘 하신 말씀은 바로 '죄사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됐습니다. 당시 죄사함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림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죠. 그러나 병자들은 성전에 못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외면 받은 사람에게 예수님은 "너도 우리 공동체 일원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돌 맞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거죠.

그게 선교사이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죄를 사해주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시는 것,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 있다고 하면 깨끗해졌으니 천국 가겠구나 하는데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 지가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들이 완전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40일 동안 시험 받으신 후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신 예수님이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ㅁ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ㅁ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ㅁ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ㅁ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장 16~19절)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걸 할거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 묶인 사람들을 해방시키겠다, 눈 먼 사람들을 보게 하겠다,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겠다, 주의 은총의 해를 전파하겠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납니까? 성령이 내리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이신 예수님의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 묶인 사람, 눈 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해방을, 다시 보게 함을, 자유를, 주의 은총의 해를 전파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은총의 해는 '주빌리(jubilee, 희년)'입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처음 읽으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방향성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더 낮게! 더 약하게!
 


우리가 동네교회청년입니다. 동네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활동을 누가 좋아해야 할까요?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이 만약 성령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으면 이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 동네 묶인 사람들이, 이 동네의 눈 먼 사람들이, 이 동네의 억눌린 사람들이 좋아져야 합니다. 그런 꿈을 꾸셔야 합니다. 

이렇게 '선교'에 대해서 말하다보면 늘 질문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선교가 뭐야? 그것과 개발이나 발전은 뭐가 달라?" 하는 것입니다. 선교가 정의하려는 시도는 최근입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정도부터였죠. 사실 교회는 그런 질문 안 했습니다. 교회 활동이 곧 선교이니까요. 초대교회는 그 자체가 선교공동체였습니다. 이거는 구제, 이거는 선교, 이거는 전도, 이거는 봉사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회 전체가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는 활동의 총체가 바로 선교입니다.

다만 최근의 고민은,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며 일어난 반성인데요. 그 때의 선교는 교회의 선교였습니다. 교회의 확장, 성도의 증가, 식민지에서 어둔 사람들 깨쳐서 기독교화 하는 것이 선교라고 여겼습니다. 궁극적으로 서구화였죠. 즉 서구교회의 확장이 선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개념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 그렇다고 선교가 완성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원하는 것이죠. 교회 수를 늘리거나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 선교입니다.

물론 개발이나 발전, 이런 것도 참 중요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복지의 증진 같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그건 맑스가 말한대로 종교가 인민의 아편인 것이죠. 개발이나 발전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개발이나 발전에 새롭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브라이언트 L. 마이어스가 쓴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선교>를 보면 성장 중심의 개발에서 사람 중심의 발전으로 옮겨와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해방시키는 선교

또 개발이나 발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 것이지요. 바로 해방신학자들입니다. 


20세기 중반에 전 세계적인 개발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도 박정희 정권 때 개발을 많이 했죠. 그 중심에는 미국에서 빌려준 차관(빚)이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가 소위 '진보를 위한 동맹(
Alliance for Progress)'을 주창하면서 자본과 교육이면 전 세계가 변화하고 진보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변화되거나 해방되지는 못했고 오히려 부패가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해방신학자들이 '해방'이라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스타보 쿠티에레즈가 <해방신학>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요. 그보다 먼저 라스 카사스라는 사람이 멕시코 선교사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오를 억압해서 플렌테이션 농업을 했는데요. 라스 카사스가 총독 앞에서 이런 설교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죽음에 이르는 죄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죄 없는 인디언들에게 한 혹독한 행위들 때문에 여러분은 이 죄 가운데 살고 있고 또 이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입니다.

무슨 권리로 여러분은 그들의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인디언들과 가증스런 전쟁을 했습니까? 어떻게 여러분은 여러분이 강요한 험한 노동에 시달리는 인디언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병을 치료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억압할 수 있습니까? 매일같이 금을 캐기 위해 혹사당하는 인디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들이 바로 인디언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누군가가 인디언들을 교화시켜, 세례를 주고 미사에 참석하고 성일과 주일을 지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디언들은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인디언들이 이성과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인디언들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까? 여러분은 깊고 냉담한 잠 속에 빠져 있습니까?

분명이 알아두시오.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려던 터키인들과 무어인들(8세기에 스페인을 침략한 아라비아인)보다도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해방되는 선교

저도 '해방'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경험이 있습니다. 2007년에 온두라스에 견습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빈민촌 초등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었는데요. 미국에서 약품을 많이 지원받습니다. 그런데 다 못나눠주고 냉장고에 넣어 놓지요. 

하루는 학교에서 자고 있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왔습니다. 무슨 큰 일이 났나 했는데, 알고 보니 마을에 한 아기가 열이 안 떨어져서 온 동네 사람이 약 좀 달라고 온 것입니다. 뭐 이런 일 때문에 다들 왔나 했는데 거기 온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 걱정이 되서 온 것입니다. 함부로 약을 줄 수 없어서 결국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습니다. 병원비 계산도 내 돈으로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 아직도 마을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 때 드는 생각이 '여기 이 사람들 중에서 해방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약을 쌓아놓고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돈이 많다고, 물자가 많다고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교사들이 배웁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본받아서 운동을 하게 되면, 여러분이 해방되실 겁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누군가 "궁극적 제자도는 죽음의 춤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타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지도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운동을 하고 실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네운동을 하면서 이 공동체에 중요한 것은, 실천공동체이자 신앙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기도와 실천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도 세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고 서로 부끄럽지 않게 영성을 유지하는 것 중요합니다.



예수님처럼 할 수 있는가

결론을 내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여덟 가지 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렵고 핍박도 받을거니까 기뻐하라고 합니다. 마음을 비우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랬습니다. 쫓기고, 핍박받고, 죽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는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라스 카사스의 설교를 듣고 단 한 명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왕에게 편지를 써서 라스 카사스의 소환과 처벌을 요구했지요. 그러나 오늘날 라스 카사스는 라틴아메리카 선교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라스 카사스에 의해 인디오 노예제가 폐지되거든요. 물론 그래서 흑인노예가 잡혀오게 되지만요. 그 지역에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싸워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랬던 예수님의 선교는 동네선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해야 합니다. 이런 비전을 가지고 여러분이 동네선교를 꿈꾸셨으면 좋겠습니다. 동네교회청년이라 이름을 쓰고 계신데, 동네청년과도 다르고, 교회청년과도 달라야 합니다. 이 교회에, 이 지역에, 이 지역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하길 바랍니다.


두 가지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는 채수일이 쓴 
<신학의 공공성>입니다. 우리 사회가 많이 글로벌화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태원에 가면 이슬람 사원이 있는데 라마단 기간이 되면 몇 만 명이 모입니다. 물론 이 분들이 선교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 분들과 어떻게 공존하고 대화할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우리가 하려는 일은 어떻게 공공성을 띌 수 있을지 고민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또 하나는 로버트 D. 퍼트넘,  데이비트 E. 캠벨이 <아메리칸 그레이스 - 종교는 어떻게 사회를 분열시키고 통합하는가>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종교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조사하고 분석한 책입니다. 우리 동네를 위해 무엇을 조사하면 좋을지 고민하기에 좋은 책 같아 추천합니다.


 
*  *  *
 
마지막으로, 너무 나이브한 말인지 모르지만, 예수님 닮아서 사세요! 그런 열정을 가지고, 더 약한 사람들과 함께, 베푸는 삶이 아니라 나도 해방되는 삶으로, 그렇게 사시길 부탁합니다.


동네에 교회가 있다고 해서
동네가 행복할 일이 별로 없는 것을 요상히 여기며,

청년들이 먼저 나서
어떤 사심도 없이 동네를 섬겨보겠노라고
동네교회청년을 시작한 지도 어언 1년이 넘었사옵니다.

금번에 선교학을 공부하시는 손승진 씨가 출국하시는 것을 기념(?)하야
예수님의 선교와 동네 선교라는 조촐한 강연을 마련했사오니,

아무쪼록 바쁘신 와중에도 많이들 오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외다.


+ Recent posts